칼 오르프(Carl Orff 1895-1982)의 생애
- 어린시절의 오르프
칼 오르프는 1895년 7월 10일 독일 뮌헨(Muenchen)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외증조부 카스파 요셉 쾨스틀러(Kaspar Josef Koestler)는 보병연대 보급참모(장교)로서 1812년 러시아전쟁 때 프스코프에서 포로로 붙잡혀 죽게 되었었다.
4일째 되던 날 감옥 문이 열리고 들리는 소리, 즉 음악을 이해하는 스위스인이나 독일인이 없느냐는 질문에 살 수 있으리라는
한 가닥 희망에 용기를 내어 바이올린, 플루트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함으로써 결국 살아남아 1814년 고향 뮌헨으로 귀환하게 된다.
외조부 칼 쾨스틀러(Karl Koestler) 역시 육군소장을 지냈으나, 눈병으로 퇴역한 후 남은 생을 고국의 역사와 관련된 작업에 헌신하였다.
역사가로서 그가 출간한 “바이에른 황실의 지역학 요람” 전집은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다.외조부는 특히 스스로가 열정적인 음악애호가로서 교회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1866년 직접 아마츄어-오케스트라단 “Wilde Gung′l [빌대 궁을]"을 결성하였는데 오늘날에도 훌륭한 연주회를 개최하는 협회로 유명하다.
1875년-1896동안 프란쯔 슈트라우스가 바로 이 오케스트라단의 지휘자였다.
그가 지휘했던 곡들에는 귀에 익숙한 장르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근대 악곡도 포함되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아들 리하르트의 초기 작품도 연주되었다.1903년 8살이었던 칼 오르프는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외조부 오케스트라단의 음악회에서 모짜르트의 ”kleine Nachtmusik [작은 밤의 음악]“과 베토벤의 제1교향곡 연주를 듣게 된다. 외조부는 이날 칼이 너무도 행복해했었다고 전한다.
칼의 기억 속에도 이날 저녁 난생 처음으로 직접 오케스트라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대단한 체험으로 남게 된다.
이 연주회는 비엔나 악파의 음악세계를 체험할 수 있었던 좋은 계기였다.칼의 어머니는 그렇듯 흥분된 아들을 충분히 이해했다. 평소에도 그녀는 아들과 함께 네 개의 손으로 베토벤 심포니를 자주 연주하였다.
칼에게는 음악회 관람이 쉽게 허락되었다.
그의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은 음악대학교와 뮌헨 왕실극장의 관람을 위한 회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외조모에 대한 어린 손자의 기억은 거의 없다.
외조모는 심장병으로 드러나지 않은 삶을 살았으나, 그녀의 남편, 즉 칼의 외조부 학문적 연구 작업에 인내와 이해로 내조하였다.
외조부모님은 뮌헨의 舊 市街(다멘슈티프트 도시의 거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생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어린 오르프는 저녁마다 외조부와 함께 뮌헨 舊 市街를 산책하며 특징적인 탑들이 많은 어두운 도시의 실루엣과 그 위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 그리고 페터스 교회 뒤에 피같이 붉게 차오르는 보름달의 모습을 자주 목격하곤 하였다.
외조부는 역사, 전설, 설화 등을 끊임없이 설명해 주면서 손자의 상상력을 자극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어린 손자의 적극적인 음악활동을 주시하여 기록한 것을 토대로 1916년 손자의 연대기를 발행하기까지 한다.칼 오르프의 친증조부 칼 폰 오르프(Carl von Orff)는 비밀 육군참모였고 역시 뮌헨에 거주하였다.
뮌헨 시 지도에는 그의 조상대대로 이어온 생가가 표시되었을 정도였다. 시내 한 중심가에 위치한 엥글리셔 가르텐[소위 ‘영국공원’]입구 부근, 프린쯔-칼-팔레이스(도로) 옆으로 “Orff-Hausl[오르프 종가집]”이란 건물이 위치한다.
그 뒤쪽으로 역시 지도에 선명하게 새겨진 “Orff-Garten[오르프-정원]”이 있고 바로 이 목가적인 곳에서 친조부, 친증조부와 같은 이름을 갖게 된 칼 [폰] 오르프 박사(Dr. h.c. Carl von Orff)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1888년 이 집은 허물어지고, 가족들은 1853년 시장의 기능에서 자유로워진, 오늘날의 마리아 광장(Marienplatz)이라 불리는 시내중심가로 이사를 하게 된다.오르프는 친가와 외가 할아버지 모두를 무척 사랑하였다. 그럼에도 집안의 대들보와도 같이 언제나 정갈한 몸가짐을 선보인 친조부는 손자 칼에게 존경스런 인물 그 자체였다.
친조부는 학문적 경력을 쌓은 뒤, 집안 전통을 잇고자 육군소장에서 은퇴하고 다시금 측지학, 수학, 천문학 분야에 심취하였다.
그는 그렇게 세속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순수 학문세계에 매력을 느끼며 집안에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뮌헨대학교로부터 역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친조부는 그의 조부와 증조부와 마찬가지로 황실훈장과 함께 귀족으로서의 칭호도 받게 된다.
친조부 칼 폰 오르프는 공인된 학자로서 바이언 학자 아카데미 및 국제 측지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측량학 분야의 많은 책들을 출간하였다.친조부의 70세 생신날 이제 막 3살이 된 손자 칼은 시 한편을 선물하려고 하였다. 며칠 전부터 어머니와 함께 축하하는 글을 지었다.
사실상 그 시는 어머니가 거의 완성한 셈이었지만, 그녀는 아들 칼이 어렵지 않게 스스로 운율을 찾아내도록 아들을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친조부의 생신날에 이르자 손자 칼은 당황하였다. 그가 상상한 것과는 모든 것이 달리 보였다.
결국 할아버지 앞에 섰을 때 그 동안 외웠던 시는 까맣게 사라져버렸고 단 한마디 입도 열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울고 싶었지만, 할아버지 앞에서 만큼은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는 무안한 마음에 할아버지의 바지호주머니를 잡고 온힘을 주어 서양자두나무[항상 지니고 다니는 도구의 의미도 있음]처럼 흔들어댔다.
모든 사람들은 이를 보고 크게 웃었지만, 할아버지는 웃는 대신 허리를 숙여 손자에게 “고맙구나. 네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았단다”하며 위로하였다.
버지니아 궐련초 연기로 꽉 찬 책상에 앉아 일하는 모습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소년의 기억 속에 생생하였다. 손자 나이 10살 때 조부의 타계는 너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뮌헨 마일링거 가에 위치한 오르프의 부친의 집은 언제나 음악으로 가득 찼다. 이웃하고 있던 군부대에서 들려오는 보병연대의 군악대 음악, 길가의 식당에서 저녁마다 들려오는 민요도 언제나 귀에 익은 소리가 되었다.
부친 하인리히 오르프(Heinrich Orff) 역시 장교였고 열정적인 음악가였다. 모친 파울라 쾨스틀러(Paula Koestler)는 예술적 소양이 다분하고 많은 면에 재치가 뛰어난 부인이었다. 그녀의 남편 직업에 언제나 이해심을 보였다. 그녀의 메마르지 않고 심사숙고한 유머감각, 적절한 위트와 진심어린 봉사정신은 누구나 쉽게 잊지 못할 정도였다.
칼 오르프의 어머니 파울라 오르프(Paula Orff)는 그녀의 사촌 요셉 기를(Josef Giehrl)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는 리스트의 제자이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친구였다. 그녀는 뛰어난 재능 덕에 이미 12살 때 연주자 자격을 획득한다.어린 오르프는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집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고, 부모님은 매일 오후나 저녁마다 네 개의 손을 위한 연탄곡을 연주했고, 주말마다 오후에는 피아노 4중주를, 저녁에는 현악4중주가 울리게 배려했다. 어린 칼이 직접 연주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의 감수성에 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할 정도로 도처에 음악이 있었다.
특히 칼보다 3살 어린 누이동생 미아(Mia)와는 사이가 좋았다. 이미 오누이는 네 개의 손으로 함께 연주할 정도였으며, 그녀는 훗날 집안에서 칼 오르프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는 첫 번째 인물로 성장한다.칼 오르프는 피아노에 앉아있을 때면 연습보다는 상상에 의한 연주나 즉흥연주(하기)를 좋아했던 만큼 그때마다 음악적 정서가 분명하게 표출되는 기회를 누렸다. 이는 기보법을 배울 때나 그의 첫 번째 작곡을 표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1903년 음악회(Konzert)를 알기 전까지 어린 오르프에게 음악하기(Musizieren)는 일차적 경험으로 소중한 부분이 되었다.
그것은 이미 그로 하여금 독학의 길을 걷도록 한 계기로 여겨진다 - 오르프는 그 당시의 유년시절을 흔쾌히 “야생의 시절”이라고 되뇌었다.유년기 연극무대에서 받은 인상도 그의 음악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종교적이고 군사적인 “공연”들은 마음 깊숙이 각인되었다: 예컨대 알프스 지방의 성탄구유, 어두운 성당에서 치러지던 부활축제, 한밤중 밝게 빛나던 도시속의 맥주통의 마개를 두드렸던 소등 신호, 북소리에 맞춰 행진하는 음악적 “트리온포(Trionfo)”로서의 군사적 축제의 장.
오르프가 4살이 되었을 무렵 인형극의 익살스런 역인 “카스페를(Kasperle[곱추인형])” 작품을 통해 받은 느낌,
6살 때 뮌헨 불루멘가에 - 오늘날 이곳에서 오르프의 작품들이 연주된다 - 위치한 인형극장에서의 인상들은 연극과 연계된 그의 독특한 음악활동을 크게 자극하였다고 본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부터 오르프는 모든 장면을 위한 문필가, 작곡가, 무대화가, 무대장치가, 연출가, 배우-성악가, 무대일꾼, 조명에 있어서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 젊은 오르프
뮌헨의 舊 도심지는 젊은 오르프에게 있어 단지 무대였을 뿐이었다. 그에게 또다른 중요한 장소로는 암머 호수(Ammersee)를 둘러싸고 있는 알프스 산 전경이 보이는 한 시골이었다. 암머 호숫가 성지순례지로 유명한 그라프라트 지역 운터알팅에 위치한 부모님의 시골집은 청년 오르프가 발견의 기쁨을 찾아 도보로 줄곧 여행을 떠나는 출발점이 되었다.
자연에서 받은 인상들뿐만 아니라 이 지방의 선사시대적인 느낌을 주는 역사에도 감동을 받았다. 이곳의 약초와 꽃들에게서 그는 “낭만적인 정원”의 영감에 고취되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듯 호수위로 피어나는 향기 짙은 봄날을 거기서 체험했다. 그 같은 봄은 한평생 그의 마음의 고향처럼 남아있었다.
그의 작품 어딘가에서 봄에 대한 장면과 마주치게 되면 유난히 빛나는 광채를 경험하게 된다: “Burana[카르미나 브라나]”의 “Primo vere[진정한 처음]”, “부활절 극”의 예수님 무덤가 경비의 이야기 중에서나 자연의 소생에 관한 장면에서나 말이다.
제법 전문가적인 지식을 가진 정원사로서 오르프는 아주 이른 봄에 잔디를 덮고 있는 차가운 눈을 녹이려고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가지고 정원으로 자주 나가곤 하였다. 그것은 그가 차가운 겨울을 하루속히 물리치려는 독특한 집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그의 학창시절은 루드빅스 김나지움에서 비텔스바허 김나지움으로 옮긴 후부터 음악에 대한 관심이 다소 완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제일 좋아했던 과목은 고대 언어였다고 하지만, “(9세기경의 그리스 시인) 호머를 읽는 것은 나에게 있어 음악이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음악은 점점 강하게 그의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오르프는 그의 높은 소프라노 목소리 덕택에 교회합창단에서 솔로로 활동하였다. 그 덕분에 19세기 오르겔 미사곡의 지루한 곡목들 내에서나마 교회의 피아노와 오르겔을 반주하는 것도 그에게 허락되었다. 첼로수업과 학교오케스트라 단원활동보다 더 즐거웠던 것은 모짜르트 곡을 이탈리아 원어로 어머니와 함께 부르는 이중창이었다.
14살이 되어 난생 처음 오페라를 관람했던 “Der Fliegende Hollaender[날으는 홀랜더]”는 그에게 있어 마치 눈사태라도 만난 듯이 아주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 후로 그는 “Ring[반지]”과 “Tristan[트리스탄]”, 공연이 계획된 모든 모짜르트 오페라, “Salome[살로메]”, “Elektra[엘렉트라]”; 연극의 고전주의; 음악회장에서는 비인의 고전주의, 베를리오즈, 브룩크너, 슈트라우스, 말러 그리고 드뷔시의 “Nocturnes[녹턴]”을 직접 듣고 심취했다 - 이 모든 것이 조부의 연대기에 날짜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음악에 관심을 쏟았던 결과로 금방 학교로부터 멀어졌다. 1년 동안만 유급하기로 했던 약속을 깨고, 그는 뮌헨 음악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조건으로 학교생활을 아예 중단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오르프는 1912년 이 시험에 합격한다. 하지만 선행된 화성학 수업이나 아카데미의 작곡반 수업이 여전히 보수적이며 낡은 방식으로 가르쳐지고 있었기에 “야생적인” 오르프에게 흥미를 끌지 못했다.
1910년도 이래 오르프는 세 번째로 op.1로 시작하면서 당시의 서정시에 곡을 붙이는 시도를 하였다.
1912년까지 기획한 대략 60여곡의 노래곡 안에는 칼 슈틸러(Karl Stieler)의 시에 의한 음향적 원료에서 모델로 하여 섬세하고 색체적인 연가곡(“Eliland, ein Sang vom Chiemsee”)이 들어있다.
오르프의 조부는 이 op.12를 발행하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같은 해 오르프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의 글에서 3부 합창곡을 작곡하여 대중에게 발표했는데 오케스트라의 악기편성에 있어 뛰어났다. 오르프는 당시 바그너의 구성(형식)에 있어서 (크레타 섬에 미로를 지은 그리스의 전설적 명장인) 다이달로스의 역할이 다소 마음에 들었다고 회고한다.
드뷔시는 오르프에게 “바그너처럼 음악을 발견하라”고 고무시켰다. 오르프는 드뷔시와의 만남을 “나의 전체적인 정서를 바꿔놓을 만큼 충격적”이었다고 뒤에 밝힌다. 그는 “드뷔시의 스타일”에 심취하면서 동시에 메테르링크(시인) 시상(詩想)의 끝없는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한 심취의 결과물이 1913/14년 각각 서로 다른 3개의 작품초안으로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형식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완숙한 경우는 아니지만, 질풍노도와 같은 힘과 미개척지를 향한 불굴의 의지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일본식 예술”에 관심을 두었던 시대적 경향의 분위기적 배경으로 op.20 "Gisei, das Opfer"를 들 수 있다.
드뷔시의 “Pelleas"의 영향을 받아 오르프는 일본에서 아주 잘 알려진 비극 ”Terakoya - Die Dorfschule"를 유럽식 음악극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오르프가 하고 싶은 많은 것에 비해 너무 조금밖에 이룰 수 없다는 판단으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드뷔시에 의해 영향을 받은 특징은 특히 고전 발레예술의 정신에 따라 무용극을 꾸며가는 연출에서 풍부하게 드러나는데, 몸짓을 동반한 음악으로서 오케스트라 극 “Tanzende Faune”에서 잘 나타난다.
아카데미 오케스트라 단에 의한 무질서한 리듬과 무지개 빛의 음향베일의 연주시도는 첫 번째 리허설때 좌절되고 만다. 그것은 아직 미개척지를 향한 도전적인 의미의 실험적 작품으로 평가된다.메테르링크의 “Serres Chaudes”에 의한 “Treibhauslieder”는 세 번째 시도였고, 이 역시 미완성작품으로 남아있다.
오르프는 순수 음악시의 한 방법으로서 동작 없는 인상을 생각하며 “Traumspiel”를 머리에 그려냈다. 거기에는 드뷔시와 나란히 음향-소음-결합, 미래파들의 “이명동음” 및 대부격인 쇤베르크의 무조성의 개혁작품들이 중요시되었다.
음향의 몽타즈(편집)를 자연적인 소리와 이색적인 악기를 이용한 효과음, 동시에 전축판에 녹음된 매미소리를 재생시켜 전위예술가의 선두주자로 인정될 정도까지 되었다. 그러나 오르프는 그 같은 방법이 자신의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이미 5살 때 피아노 수업을 받으며, 젊은 시절 고전어(라틴어)와 문학(특히 Nietzsche의 작품세계)에 남달리 흥미와 열정을 보였고, 이러한 언어와 시문학에 대한 견문을 바탕으로 16살 때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이미 50곡 이상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1913-14에는 뮌헨에 있는 음악(전문)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당시 독일에 들어온 ‘재즈음악’은 큰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움을 추구하던 오르프 역시 이 음악에 감탄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고, 또한 異國的 음악에 무척 흥미를 느꼈으며, 이런 요소는 그의 작품활동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뮌헨, 다름슈타트(Darmstadt), 만하임(Manheim) 등지에서 가극장의 지휘자로 일하였으며, 1919년 이래 뮌헨에서 상주하던 그는 카민스키(Kaminski)에게 사사(私師)를 받게 된다. 1923년 도로테 귄터(Dorothe Guenther)를 만나 1924년 그녀와 함께 공동으로 귄터학교(Guentherschule)를 세운 다음부터는 이 학교에서 음악부 총책임자로 일하게 된다.
이로써 오르프는 교육자로서의 첫 출발을 했고, 바로 이곳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그의 교육용 작품(“Schulwerk”)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때 또한 교습생으로서 베를린에서 뮌헨으로 내려온 구닐드 케트만(G. Keetman)과 인연을 맺게 된다.한편 르네상스와 바로크 음악에도 관심을 두었던 그는 몬테베르디(Monteverdi) 작품을 탐닉하였고, 뮌헨 바하협회 지휘자로서도 일하였으며(1930-33), 바하(Bach)의 《루까 수난곡》을 위시하여 쉿쯔(Schuetz)의 《부활곡》등도 그의 대표적 연주곡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오르프의 주요 작품으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의 대표작인 극적 칸타타 제1부 《카르미나 부라나, 1935년에 완성, 37년에 초연》, 전설이야기를 소제로 한 오페라 《달, 1939》과《현명한 여자, 1943》, 극적 칸타타 제2부 《카툴리 카르미나, 1943》, 극적 칸타타 제3부 《아프로디테의 승리, 1953》, 그리스의 서사극을 다룬 《안티고네, 1949》등을 꼽을 수 있다.
오르프 작품 속에 나오는 음악적 배경은 “음악, 언어, 몸의 동작(춤)의 세 요소를 하나로 하는데” 목적을 둔다.
이러한 하나-됨을 통해서 이루어진 드라마는 이를테면 世界의 投影이라고 하며, 오르프는 자신의 극작품을 世界劇이라 불렀다.“음악, 언어, 몸의 동작(춤)의 세 요소를 하나로 하기 위한 원초적 접근”은 리듬의 절대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고, 단순한 화성구조에 의하면서 리듬의 반복 혹은 동기, 악구, 악절의 지속적인 반복이 악곡을 즉흥적으로 연주하도록 하는 기본 구성원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중요한 리듬은 그의 교육원리의 핵심이다.
오르프-슐베르크에서 사용되어진 악기들을 총칭하여 오르프-악기라고 하는데, 이들 악기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누구든 기꺼이, 곧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연주되어질 수 있는 특징을 띤다.1961년에 오스트리아 잘쯔부르그(Salzburg)에 세워진 오르프-연구소에서 오르프는 1982년 3월 29일 생을 마칠 때까지 음악교육자 후진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뮌헨의 舊 도심지는 젊은 오르프에게 있어 단지 무대였을 뿐이었다. 그에게 또다른 중요한 장소로는 암머 호수(Ammersee)를 둘러싸고 있는 알프스 산 전경이 보이는 한 시골이었다. 암머 호숫가 성지순례지로 유명한 그라프라트 지역 운터알팅에 위치한 부모님의 시골집은 청년 오르프가 발견의 기쁨을 찾아 도보로 줄곧 여행을 떠나는 출발점이 되었다.